심부름으로 황동규 선생님의 명예교수 연구실에 다녀왔다. 영문과 교수님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, 아직 관악에서 연구실을 사용하고 계신 줄은 몰랐다. 뵙기 전에 그 분이 쓴 시 하나를 읽고 가면 좀 더 잘 알아볼까 하여 읽고 갔다. 불꺼진 책상 가운데 한 군데가 밝혀져 있어 다가갔더니 할아버지 한 분이 책에 파묻혀 분주하셨다. "황동규 선생님이세요?" 하고 조용히 여쭙자 내 쪽을 바라보고는 "아, 예!" 하고 몸을 돌리셨다. 일흔이 훨씬 넘으셨을텐데,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소년 같음이 묻어나왔다. 삶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표정이라고 생각했다.
받아야 할 서류를 받고 나니, 내게 뭔가 그래도 말을 건네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, "거기는 조교 학생이 몇 명이나 돼요?"하고 물으신다. "예, 하루에 한 명 있는데요, 오늘은 제가 하는 날이예요." 하며 나도 같이 환하게 대답했다. 웃으면서, 이렇게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환한 웃음을 지어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. 오랜 세월 풍파에도 꺼지지 않은 눈빛! 주변 사람을 같이 웃게 하는 눈빛에 나는 환하게 화답하였다.
자꾸만 내 눈에 빛이 꺼지고, 마음 속에 불꽃이 꺼지고 있었다.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던 나는 삶의 무상함과 고통을 읊조리고 있었다. 나는 그 동안 애써 짜낸 의지나 다짐으로 내 안의 불씨를 살리려고 했으나 잘 안 되었다. 그런데 갑자기 마주친 시와 시인의 눈빛이 나를 저릿하게 했다. 한참 젊은 나는 왜 다 죽어가는 눈빛을 하고 있었지? 저 눈빛을 보자 놀랍기도 했고 욕심이 나기도 했고, 부끄럽기도 했고, 안심이 되기도 했다. 온갖 삶의 파노라마를 겪고도 저렇게 빛나는 눈을 할 수 있군요. 시 하나가 가슴에 박힌 채로 나는 오랜만에 편히 웃어보았다.
작성자: 익명